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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사법에 개입했을 때

기획부서에 근무하던 시절의 일이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분들의 누명을 벗겨주는 일을 기획하게 되었다. 잘못된 수사와 판결로 피해를 입은 분들을 대상으로 검찰에서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해 무죄를 받게 해주는 내용이었다. 뒤늦게나마 국가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금전적으로라도 배상을 해드리자는 취지였다.

대검찰청에서 사건을 일괄적으로 검토한 후 대상이 될 만한 사건을 추려내 일선 검찰청에서 직접 재심을 청구하기로 했다. 대상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의사를 물었다. 그 중 몇 분은 직접 찾아 뵙고 설명을 드리기도 했는데 유난히 인상 깊었던 분이 계셨다.

그 분은 외국 유학을 다녀와 대학에서 교수를 하셨다. 사모님도 국내 유수의 대학을 나와 남들이 선망하는 공직에서 근무하셨다. 어느 날 모임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수사를 받게 되었고, 그날 이후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본인과 사모님이 수감되어 오랜 기간 수형생활을 한 것은 약과였다. 큰 아들은 의문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작은 아들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아 어디를 떠도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사모님은 벌써 오래 전에 세상과 등진 상태였고 본인은 단칸방에서 혼자 살고 계셨다. 방안에는 각종 책으로 가득해 몸 하나 누일 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신다고 했다.

너무 늦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왜 이제까지 재심을 청구하지 않으셨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그 분은 세상에 통달한 듯한 담담한 말투로 말씀하셨다.

‘우리 집사람이 세상을 떠나면서 나에게 한 말이 있다.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다. 잘못은 국가가 한 것이다. 그러니 언젠가 국가가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사죄하러 올 때까지 절대로 먼저 굽히지 마라. 먼저 나서서 재심을 청구하지도 마라.’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말씀이었다. 개인적으로 몇 번이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지만, 그것만으로 그 분에게 위안이 될리 없었을 것이다. 정치가 사법에 개입했을 때 생기는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정치는 언제나 사법을 통제하려고 한다. 통치의 도구 중 하나로 삼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그건 여당이건 야당이건 가리지 않는다. 

사법이 정치의 압력에 굴복하면 어떻게 될까. 머지 않은 미래에 또 다른 피해자에게 사과할 일이 생길 것이다.

정치는 이미지의 영역이다. 팩트(fact)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옳고 그름이 아닌 좋고 싫음이 지배하는 분야이다. 옳은 것이 아닌 ‘내 편인지 남의 편인지’가 정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사람들은 때로 이성을 발휘하고 싶어하지만 바람과는 반대로 대부분은 감성에 의해 세상을 판단한다. 좋고 싫음은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상으로, 감정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나중에 사실이 확인되어도 바뀌지 않은 속성 또한 가지고 있다.

따라서 옳고 그름 혹은 합법과 불법을 구분하는 작업이 사법 작용의 거의 전부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팩트를 확인하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때로는 팩트를 확인해도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의심을 받기도 한다. 이런 근본적인 차이 때문에 사법과 정치는 서로를 이해해주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없다.

필자는 가끔 TV를 통해 중계되는 국회의원들의 질의를 보면서 이질감을 느끼곤 한다. 의원들은 자신들이 짜놓은 프레임 속으로 끊임없이 증인들을 끌어들이려고 한다. 긴 질문과 아주 짧은 답변이 대표적이다. 조금이라도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답변이 나오면 가차없이 잘라버린다. 때문에 가끔은 질의하는 의원과 답변하는 증인이 충돌하기도 한다. 정치가 사실을 확인하는 분야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검찰이든 법원이든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정치적인 사건을 수사하고 재판하게 되면 내 편이 아닌 다른 편으로부터는 필연적으로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불리한 결정과 재판 결과를 받게 된 편에서는 정치적으로 보면 그것이 정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불의일 것이다.

국가가 진정 국민을 위해 존재하려면 이제는 정치가 사법을 놓아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3권 분립을 진정으로 실현하는 길이자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는 길이다.


2024. 11. 25.자 법률신문